한국 사회과학 서적

너도 나도 미국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은 주류학계와 태동부터 사회운동의 도구였고 지금도 그 이상의 자율적 영역을 구축하기엔 요원한 비판적 학계가 양분하고 있는 한국 사회과학계에서 "한국어"로 된 수준높고 진지한 사회과학 연구서가 나오기는 정말 쉽지 않다. 대형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이런저런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있으나 솔직히 돈주고 사도 아깝지 않은 그런 감동적이고 존경스러운 연구서는 찾기 정말 어렵다.

주요 서점 사회과학 코너를 가보면 대부분 번역서이거나, 국내 저자의 경우 이른바 논객들의 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강호의 세계가 치명적일 정도로 매력적이라는 것은 무협지에 잠시나마 침례받았던 경험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는바, 그러나 일대일 혹은 일 대 수십 정도의 싸움에서는 수퍼맨과 같았던 강호의 고수들이 역사를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본적이 없다.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전쟁에서는 강호의 고수 몇명보다는 추풍낙엽같은 취급을 받던 무명의 병사1, 병사2,...병사5000, 병사6839의 떼거리가 소중한법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병사들의 이야기나 우직한 장수의 지루한 이야기보다는 박력있고 역동적이며 낭만적인 강호의 고수들이 만들어내는 무협지에 이른바 '중독'된다.

하다보니 절대 적절하지 못한 비유가 되어버렸으나 (客 자 공통점 하나에 혹해서...), 여튼 논객들의 글은 강호 세계의 치명적 유혹과 비슷한 방식의 매력을 독자들에게 뿜는다. 그리고 본인을 비롯한 많은 한국의 사회과학도들을 대학원으로 이끄는 것은 학술서보다는 그러한 논객들의 글인 경우가 많다. 물론 논객들의 글들 자체의 가치나 재미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지루하고 소수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전문용어로 쓰여진 학술서보다 진중권의 시원하고 정확하게 까대는 글이 작게는 독자들의 정신건강부터 크게는 사회변화를 이루는 데까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니까. 다만 지루하고 그 가치를 못알아먹을 펀더멘탈이 받쳐주지 않은 채 논객들의 글만 베스트셀러가 되는 "사회과학 서적 코너"는 어쩌면 무협지의 판타지와 비슷하다...고 한다면 좀 오바일까.

주류학자가 대중들을 대상으로 과학적이면서도 크리티컬하게 아주 잘 쓴 책이 사회과학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 얼마나 큰 바램일지, 오랜 염원으로 삼아야 될만큼 어려운 바램인는 잘 모르겠다. 척박을 넘어서 천박하기가 짝이 없는 한국 비인기 종목 바닥에서도 김연아, 박태환은 나왔으니까.

여하튼 콕 찝어서 하고 싶었던 말은
한국의 사회과학 학술서의 펀더멘털은 너무나 취약하다
는 것이다 (이 간단한 말을...).

그래도 개인적으로 몇 권 추천해보면...



이런 저런 한국책들이 내 책장에 많이 꽂혀 있었으나 미국에 오면서 정말 좋은 책들을 제외하고는 다 처분했다. 그래도 태평양을 건너 미대륙를 횡단해 올 때 같이 데리고 올껄 싶은 아쉬운 생각이 들게 하는 책들이 몇 권 있기는 하다. 일부는 학술서라기보다는 교양서고 한 권은 사실 번역서다.


1. 우석훈, 박권일,88만원 세대.

왜 계급론을 부정하고 세대론을 주창하냐고 반론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이게 그런 이야기로밖에 안 읽히냐고 되묻고 싶다. 계급론의 핵심은 세대간 전수이고. 세대간 전수같이 종적 연결간의 비교가 아니라 세대 내의 횡적 기반 간의 비교를 하려면 당연히 새로운시각이 필요하다. 불평등을 한가지 관점에서만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더군다나 명백히 한 방향만큼이나 다른 한 방향의 흐름이 크게 보인다면.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를 접근하는 대안적 시각을 열어준 책이라 생각한다. 물론 우석훈 씨의 글쓰기 스타일은 별로 호감은 아니다.


2. 최정규, 이타적 인간의 출현.

경북대에서 사이언스나 네이쳐지에 논문을 싣는 교수에게 1억원을 주겠다는 너무 고매해서 손발이 겸손하게 오그라드는 공고를 했는데 거기에 당선된 사람이 엉뚱하게 경제학과 교수였다고 한다. 최정규 교수가 UMass의 스승 허버트 진티스와 공저한게 실렸는데, 글쎄 사이언스, 네이쳐 논문이 1억원짜리인지는 모르겠다. 돈이 없는 건 아니다. 돈을 잘쓰기 위한 노력이 없는 거지.

여튼 최정규 교수가 진화경제학/행태경제학의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쉽게 쓴 책이다. 강의를 조곤조곤 담담하게 하시되 그렇다고 답답하게 하시는 스타일은 아닌데, 책도 좀 비슷하다. 관심이 있다면 쉽게 재밌게 읽힐터이나 관심 없는 자들까지 끌어당길지는 모르것다. 개인적으로는 한꺼풀 더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3. 김용학, 사회구조와 행위.

김용학 선생 같은 이론가는 한국에 없다고 생각한다. 독보적으로 훌륭하다는 의미는 아니고 합리적 선택 및 네트워크를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기초를 닦아준 '이론가' 수준의 학자로는 거의 유일하다는 말이다. 일반 비전공자 독자들에게는 별로 관심대상이 아니겠지만 진지하게 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질문인 구조와 행위, 거시와 미시의 질문을 합리적 선택 및 네트워크 이론의 관점에서 명쾌하게 정리하고 답해주신다. 물론 새로운 건 없다. 시카고에서 잘 배우신 걸 한국의 맥락에 맞게 잘 정리, 소개한 측면이 크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한국에서는 매우 큰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 솔직히 90년대 한국 사회학계의 역작이라 생각한다.


4.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주류 사회과학자의 베스트셀러라는 꿈에 가장 가까운 현실이 아니었을까. 최장집 선생은 이 책만으로도 오래오래 평가받고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건 한국 바보, 최장집 지못미일뿐.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에서부터 제기되는 문제의식은 사실 지극히 보편적인 이론적 태클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지극히 한국의 현실적 맥락에 대한 목소리를 담고 있기도 하다. '민주화=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도 늘 민주주의를 걱정해야 하는 거는 당연한 건데 우리는 늘 독재랑만 비교하고 또한 현재의 민주주의를 쉽게 민주주의의 완성형, 이념형으로 착각하게 되니까.

최장집 선생의 지향과 방점은 정당민주주의의 정상화다. 이 해법이 여전히 유럽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물론 여기서 자유로운 진보주의자는 거의 없을 거다...NL들 빼고. 그들을 진보로 넣어준다면 말이다...이런 유럽에 대한 환상이 한국 진보 발전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명박 시대를 보면서도 그 진단에 동의할 수 있을까 (실제로 욕 좀 드셨다. 노무현이 못했으니 딴날당에 넘겨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발언하셔서)라는 점에 딴지를 걸 수 있겠다.


5. 정이환, 현대 노동시장의 정치사회학.

전반부에 문제의식을 개괄하고 이론들을 정리 평가한 부분과 중후반부에 이런저런 실증분석을 한 부분으로 크게 대략 나눌 수 있는데, 솔직히 전반부만 봤다. 고민과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라 전반부 만큼은 탁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읽는 내내 그래그래, 그런거지, 맞아맞아, 토닥토닥(?) 하며 읽었었다. 비판적 지향의 학자 답지 않게 비교적 최근의 미국 경제사회학 문헌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감동? 적이었고, 노동시장의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사회학이라는 제목에서 보이듯 문제제기도 탁월했다.

원래 통계분석을 전문적으로 깊이 하시는 분은 아닌지라 다만 실증분석부분은 얼핏봐도 약간 나이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계급, 노동시장, 사회이동에 대한 분석만큼 복잡하고 지저분한 영역이 또 없다. 그래서 어떤 방법론과 모델을 채택하는가에 따라 결과도 많이 달라지고 해석도 많이 달라진다. 특히 한국과 같이 자료의 질이 보장이 안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런 점에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런 면에서 나이브한 분석에 얼마나 큰 의미를 두어야 할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물론 뒷부분을 다 안 읽어서 이 책이 딱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생각했던 말을 사족 삼아 적었을 뿐.


6. 경향신문 특별취재팀,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솔직히 아직 못 봤다. 하지만 평이 엄청 좋다. 경향신문 기자들, 아니 한국의 일반 모든 기자들, 저널리즘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한 게 아닌가 싶다. 아니 못봤으니 그런말 할 자격은 없다. 아니 그만큼 좋은 평이 사실이라면 그런게 아닌걸까 생각하는 거다. 일단 제목만보면 그런 기대의 자격이 있어보인다.
 

7. 니혼게이자이신문사. 인구가 세계를 바꾼다.

일본 저널리즘의 위력이라고 할까. 훌륭한 신문이라면 일년에 이런 책을 한권 이상씩은 내줘야 하지 않을까. 인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도 그 중요한 걸 제대로 다루는 사람이 없다. 이런 대중 교양서가 나오려면 그 사회에 인구문제를 지루하게 파고드는 인구학자들이 수십명은 되야 할텐데 (일본의 인구학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일본보다 인구문제가 더 심각한 한국에는 내가 아는 한 인구학자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글쎄. 정말 몇명 안되는 거 같다. 뭐, 한국은 원래 그런 나라다. 여튼 이런 책은 아무나한테도 추천.



한국 책 읽은지 오래됐다...-_-;;;

by 하늘타리 | 2009/01/11 01:20 | 투덜이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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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존레논 at 2009/01/12 11:09
난 '88만원 세대' 그리 좋지 않은 시각으로 봤는데. 틀린 글이라기 보다는 말 그대로 '시각'의 차이 정도 흠흠.... '사회구조와 행위', '인구가 세계를 바꾼다'는 못 본 책이다... 한 번 봐야겠다^^
Commented by 하늘타리 at 2009/01/13 01:47
사회구조와 행위는 좀 이론적인 책이지. 하지만 아주 쉽게 잘 쓰여져서 읽어보면 재미있음. 인구가 세계를 바꾼다도 상당히 재밌어. '인구'에 대해 제대로 다룬 한국 학술서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 한국 사회과학계의 현실이자 비극이지. 그래서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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