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을 바꾸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경복궁과 광화문, 시청 앞 광장을 덮기 충분할 만큼의 사람들만 있으면 된다. 87년 민주화 항쟁도 그 정도의 수로 이루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다 바뀌어야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사실 전체주의와 다르지 않다. 전부가 아니더라도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집합행동의 메커니즘이자 민주주의의 원리이다.
종종 지성적임을 공공연히 자임하는 진보 시각의 사람들이 '모든 개인의 변화만이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냉소, 비관주의, 대중에 대한 불신 혹은 비이성적 행동에 대한 비판 등등의 잘난 척을 하곤 한다. 가끔씩은 메스껍다.
요는, 사람이 없어서 세상이 바뀌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멍청한 20대 대학생이나 여전히 박정희만 찾고 있는 70대 경상도 노인이 혹은 아직도 부동산 대박을 꿈꾸며 강남진출을 호시탐탐 노리는 40대가 촛불이 눈앞에서 바다를 이루며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도, 노무현의 죽음과 그를 기리는 놀라울 정도의 추모 열기와 그 엄숙함을 목도하고서도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좌절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근거나 혹은 당신의 얄팍한 비관주의의 기초를 제공할 수 없다는 말이다.
2.
지금 현재의 이야기를 하자면, 지난 추모열기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한 수의 사람들, 그 조건은 마련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각각 다른 정도의 참여 문턱(threshold: 이 정도 조건이 되면 나도 기꺼이 저들의 운동에 동참하겠다 하는 그 문턱. 보통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면, 철수는 2명이 참여해도 동참하지만, 영희는 5명이 참여해야만 동참한다)을 낮추거나 만족시킬 촉발 요인이 적절한 타이밍에 발생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통제되기도 예측하기도 어렵다.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현재 MB정권처럼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신뢰를 듬뿍 줘가면서 정국에서 삽질을 해주는 경우에는 곧 그만큼 불만과 감정 그리고 이익에 기반을 둔 집합행동이 촉발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사회운동/집합행위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현 정권이 작년 쇠고기 정국 이상의 민중봉기 위기를 피해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것이 6월 이전에 있게 된다면 -- 7월이 넘어가면 더 힘들어지겠지. 날씨가 더워지고 휴가들을 가게 되니까, 그리고 대학생 방학 -- 한국 현대사와 6월 초여름의 인연은 지속되는 것이 되겠다.
3.
대한민국 사회에서 -- 아니 사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지만, 특히 대한민국에서 극단적으로 도드라지는 -- 진보는 보수에 비해 논리적/합리적/이성적 차원과 윤리적/도덕적 차원에서 모두 우위에 있다. 너무 명명백백해서 논증할 가치도 못느낀다.
한국에서 보수적 정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래서 둘 중 하나다: 따져보면 명명백백한 것조차 이해하지 못할만큼 지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무딘 것이든지, 충분히 똑똑하고 착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특정 부분에 눈을 감고 있는 것이든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보수가 열등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요는 진보개혁적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수구보수적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 보면서 답답해 할 필요가 없으며 그냥 무시하거나 가엽게 여기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은 정치적 세력으로서 수구보수가 우스우니 무시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며 한편으로 철학적 보수주의(자)를 무시하자는 이야기 역시 아니다.
4.
한국의 근현대사는 거의 단 한번도 정치적/경제적 지배계급 vs. 피지배계급(민중/국민/시민)의 구도가 깨어지거나 변동을 겪은 일이 없다. 지배계급이 나라를 말아먹으면 백성이 피를 토하고 흘리며 공동체를 구해내고 지배계급은 뻔뻔한 얼굴로 돌아와 왕노릇을 재개한다. 이 구도는 근대와 해방, 심지어 민주화와 같은 변화를 거치면서도 놀랍도록 재생산되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은 대단히 큰 상징적 의미를 가진 인물이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잘 사는 집안 출신이 별로 없음에도 그가 유달리 비주류의 즉, 엘리트가 아닌 국민의 대통령의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정치사회 엘리트의 룰을 깨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드라마틱하기로는 김대중이 더 하지만 감동과 공감은 노무현이 으뜸인 이유다. 그래서 그의 실패가 더 뼈아프고, 더 심란하고, 그 후폭풍이, 그 반동이 더 컸던게다. 오죽 실망했으면 쥐를 뽑았을까.
한국의 진보주의자들, 진보정당은 이 부분을 과소평가해왔다. 이번 조문정국은 아마도 틀림없이 진보들에게 이 부분이 아직도 얼마나 크고 중요하게 국민들에게 남아있는가를 인식시켜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에게는 우울한 전망을 보여준다. 첫째, 적어도 십년 내지 이십년이 지나기 전까지 민주-반민주라는 타이틀로 지난 20년 동안 표출되었던 주류 vs 비주류, 지배계급 vs 국민의 구도가 그들의 잠재적 지지자들 사이에서 (어차피 지지하지 않을 보수-수구류의 사람들은 제껴놓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왜냐하면 이게 좋은 정책 개발하고 차별화한다고 해서 바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둘째, 그렇다고 진보정당이 진보/좌파의 가치를 포기하고 이 올드한 구도의 게임으로 되돌아 들어간다면 그것은 한국에서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라는 점.
이 비관적이고 우울한 상황 속에서 진보정당은 지금까지 해온 만큼 어려운 줄타기를 계속 해야할 것 같다.
5.
어쩌면 정말 노빠와 진보신당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거하신 노통이 탈권위, 민중적, 비주류의 상징이지 신자유주의의 상징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면, 노빠와 진보신당 간의 불편함은 노빠가 한때 노빠였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낙인 그리고 운동짬밥을 훈장으로 알고 내세우는 측과 근본없이 감동받아 노란 풍선을 들면서 열광하면서 정치의식에 눈뜬 측 사이의 감정적/정서적 갈등 외에는 사실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6.
한겨레, 경향이 실수를 했고,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서 조중동과 비교를 한다든지, 노무현이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추진했다고 해서 이명박과 함께 신자유주의자로 병치시킨다든지 하는 인간들이 있다. 못지 않은 쓰레기들이다.
7.
왕을 바꿔도 세상이 바뀐 건 아니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다시 깨닫는다. 세상이 바뀌려면 훨씬 어려운 과정과 싸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렇기에 작은 부분의, 작은 순간의 변화도 의미가 있고 그것의 의미와 결과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한편으로 민주화 이후 일시적이 아닌 지속적인 반동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고로 역사의 승리자는 산 MB가 아니라 죽은 노무현이 될 것이다.



